Kevin's Letter
(평소보다 '긴 글' 입니다. 뉴스는 아니지만, 미국 여행 중에 떠오른 단상을 옮겨봤습니다. )
수돗물을 틀었는데 붉은색 물이 나온다? 제 생각에 오늘 저녁뉴스의 ‘톱’은 바로 이겁니다. 2019년에 인천에서는 붉은 수돗물이 나오는 바람에 시장이 시민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붉은 수돗물 ‘사태’라고 부릅니다. 환경 당국이 조사해보니 다행히 인체에 유해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붉은 물의 정체가 ‘녹물’이라는 점에 많은 인천 시민들이 분개했습니다.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비슷한 일을 관찰했습니다. 수도관에서 노란 물이 나오는데 담당 공무원들은 ‘망간’이 섞여 색깔이 그리 됐다며 마셔도 된다고 친절히(?) 안내를 했습니다. 문득 2019년 붉은 수돗물 ‘사태’ 때 봤던 기사 제목이 떠올랐습니다. “이걸 마시라고?” 미국 기자들은 제목을 어떻게 뽑을지 기대가 됐는데 기사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국에선 정부와 공무원들이 시민들을 안심시켜주길 바라는 기대가 분명히 존재하는 듯 합니다. 작가 김훈은 산문집 <<라면을 끓이며>> 에서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를 들으면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도 아름답게 작동되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국가관, 보편적 정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의 기능은 정확하고, 아름답게 작동해야 하는 거죠.
얼마 전부터 미국 대륙을 동서로, 자동차로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저 위 사진은 콜로라도강 인근을 지나며 찍은 사진입니다. 몇 발자국만 더 내디디면 무저갱으로 떨어집니다. 제대로 서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다가가서 겨우 사진으로 남겼습니다. 이런 절벽 근처에서도 대담하게 포즈를 취한 채 사진을 찍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공무원들이 진작 출입금지 구역으로 지정하고 차량을 우회시켰을 겁니다. 그런데 이곳은 출입금지 구역이 아닌 유명 관광지입니다. 절벽 가장자리로 다가가는 것을 제지하는 공무원은 더더욱 없습니다.
"At your own risk." 미국에서 가장 많이 본 경고 문구입니다. "사고 나면 네 책임"으로 해석하면 맞을 것 같습니다. 국가의 권능이 느껴지지 않는 자연 환경을 자주 맞닥뜨립니다. 한국이었다면 "정말 위험한 곳이면 진작 '군청'에서 무슨 조치를 했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미국에선 정말 위험한 곳인데 아무 조치도 없는 곳이 정말 많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보다 더욱 조심을 하게되는 긍정적(?) 효과는 있긴 합니다만...
한국과는 다른, 미국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관념이 빚어낸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이 행동에 따른 결과에 책임을 진다는 전제가 성립한다면 정부가 개인의 행동에 개입을 할 근거도, 이유도 없습니다. 아무리 국가의 기능이 정확하고, 아름답게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국가 권력의 자장으로 시민들이 들어서는 순간 시민의 행동은 어느 정도 제약되고, 자유는 위축되기 마련이니까요. 광활한 서부를 개인이 '개척'한 팽창의 역사가 있는 곳이니 이런 국가관이 자리잡는 것도 언뜻 이해가 갑니다.
제가 미국에서 만난 어느 분은 정부와 시민의 이런 관계가 어쩌면 미국 사회와 경제가 가진 혁신의 동력 아닐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제약 없는 공간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상상, 자기 책임의 원리하에 과감하게 추진되는 행동이 창조의 원천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위험을 감수하며 도전에 나선 뒤 기어이 성공한 기업인은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되고요.
반면 한국에서는 정부의 경제 정책과 방침에 조응하며 유망 산업을 예측하는 것이 기업인을 비롯한 경영 전문가들의 주요 역할입니다. 정부의 정책 금융을 기대하는 기업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정부 정책과 기업 활동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도 있고, 정부라는 뒷배가 기업의 안전망 역할을 해주기도 하죠.
큰 위험을 감수하면 큰 보상이 주어지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체제가 기술 혁신의 토양이 되기도 하지만, 과연 그런 체제가 지속가능하면서 지고지선한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기술 혁신 등에 힘입어 막대한 부가 한 사람에게 몰리는 체제가 정상이 아니라는 비판적인 시선도 분명 미국 내에 존재하니까요. 모리스 버먼이라는 사회문화비평가는 <<미국은 왜 실패했는가>>라는 책에서 바로 앞서 이야기한 주장을 펼치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험을 무릅쓰고 절벽 주변에서 기가 막힌 경치를 감상할 수 있긴 한데, 누군가는 다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두가 안전한 길을 걷긴 하지만 절경을 직접 보지는 못하고 항공 사진으로 감상을 해야 합니다. 어떤 여행 코스를 선택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