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안 '논픽션 읽기'가 취미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미하고 건조하게, 사실을 하나하나 쌓아올린 논픽션의 성채에 들어앉아 있으면 충만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글은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치열하게 경험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자료를 수집한 뒤 온 몸으로 모니터의 커서를 밀어붙이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빌딩을 책으로 채운 일본의 논픽션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동경했고, 죽음과 일본 현대사, 뇌과학 등 전방위로 튀어오르는 그의 지적 호기심에 경탄했습니다. 20년 동안 미국 전역의 지층을 탐사한 뒤 900페이지 짜리 벽돌책을 출간한 미국의 논픽션 대가 존 맥피의 끈기는 저를 겸손하고 숙연하게 만들었죠.
언젠가 한 번은, 기어이 논픽션을 써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접게 해준 인물 역시 데이비드 헬버스탬이라는 논픽션 저널리스트입니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등에 대한 벽돌책을 그야말로 기계로 벽돌 찍어내듯 척척 썼습니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은 <<최고의 인재들>>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저의 뼈를 때립니다. "언론인은 대개 자기 일의 형식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800자 내로 써야 한다면 생각도 800자 길이만큼 하고 끝내버린다. 저녁 뉴스에서 1분이나 1분15초 내로 보도해야 한다면 생각도 딱 그 길이만큼만 할 것이다." 저의 전두엽은 이미 1분 짜리 글쓰기에 너무 익숙해진 것 아닌가 싶습니다. 데이비드 헬버스탬의 벽력같은 일갈을 들은 이후로 논픽션은 잘 읽지도 않습니다.
논픽션과 거리를 두다 간만에 훌륭한 논픽션 한 권 읽었습니다. 전순예 작가의 <<세일즈 우먼의 기쁨과 슬픔>>입니다. 1970년대 강원도에서 문구점과 서점을 운영하다 80년대에 상경해 '방문판매'를 하시던 분이 칠십대가 되어서 이 책을 출간했습니다. 남의 집 벨을 누르는 것도 무서워할 정도로 숫기가 없는 분이 외상으로 물건을 판 뒤 겪게 된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외상 장부를 적은 손이 덜덜 떨렸습니다. 수첩에 볼펜으로 글씨를 쓰지 못하고 점만 찍어댔습니다."
이 분 아니었으면 어렸을 때 만났던 문구점 사장님이나 방문판매 아주머니들의 경험과 감정, 고민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다시 한 번 논픽션에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도 생겼습니다. 칠십대가 되면 한 권 내든가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