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장애인의 천국이라고 부르는 분들이 많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버스를 이용한 적이 두 번 있습니다. 장애인이 저상버스에 탑승하면 운전기사가 휠체어가 움직이지 않도록 휠체어를 바닥에 고정시켜 줍니다. 운전기사는 장애인이 하차할 때 고정 장치를 해체합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당연히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운전기사도, 장애인도, 승객도 그 과정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 했습니다. 대형마트에 갔더니 의류 매장에 장애인 마네킹이 있었습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라고 누군가 트집을 잡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쨌든 올바르다는 느낌은 들었습니다.
미국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인보다 선량하다고 봐야 하는지 궁금해지는데요. 미국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의 자서전 <<나는, 휴먼>>을 읽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장애 활동가들이 접근성이 떨어지는 대중 교통에 항의하기 위해 버스를 세우고 휠체어에서 내려 기어 올라가는 시위를 벌인 시점이 1983년입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재활법 504조'는 1973년 제정되긴 했지만, 그 과정도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미국 장애 운동가들은 이런 국면에서 과격한 대응 방식을 채택했다는 겁니다. '재활법 504조'에 닉슨 대통령이 서명을 하지 않고 시간을 끌자 주디스 휴먼은 다른 장애 활동가들과 함께 뉴욕 맨해튼의 간선도로를 점거합니다. 네 개 차선을 모두 막았다가 나중에 한 개 차선만 막는 것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재활법 504조'가 제정됐는데도 실질적으로 법률안의 내용은 시행되지 않았고 연방 정부의 지원을 받는 보건, 교육 시설에서 장애인의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주디스 휴먼이 1977년 동료들과 24일 동안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점거합니다.
미국이 장애인 천국이라지만, 천국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 아닌 듯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우연'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시위를 옆에서 취재한 기자 중 한 명이 ABC 방송 샌프란시스코 지국의 에번 화이트입니다. 에번 화이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 DC까지 시위대의 이동을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당시 ABC 본사에서 파업이 있었고, 기사가 부족해지자 샌프란시스코 지국 기자 에번 화이트의 취재 내용을 본사 뉴스에 끼워넣었습니다. 이렇게 샌프란시스코 연방 건물 점거 농성은 지역 현안을 넘어 미국 전국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는 주제가 됐습니다.
에번 화이트는 휠체어를 타고 직접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닌 경험을 보도해서 장애인들의 공감을 샀습니다. 에번 화이트는 기자실(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 들어가지 못한 장애 운동가들을 대신해서 칼리파노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에게 '재활법 504조'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집요하게 묻습니다. 칼리파노 장관이 에번 화이트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지 않자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와 이 질문을 했습니다.
주디스 휴먼은 에번 화이트 기자가 장관에게 질문을 하는 순간 '재활법 504조'가 실행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합니다. 주디스 휴먼의 자서전을 읽는데, 묘하게 이 대목에 여러차례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미국 장애인 운동사를 일별하면서 지금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에번 화이트 같은 기자인지, 방송국 파업 같은 약간의 우연일지, 혹은 과격한 장애 운동인지 고민하게 됩니다.
(ABC방송 파업 내용은 <<나는, 휴먼>>이 아니라 <<친애하는 슐츠씨>>라는 책에서 알게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