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소속 '기독교 원리주의자' 후보가 당선됩니다. 2028년엔 공화당 후보가 재선에 성공합니다. 미국은 하나의 정당이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가 됩니다. 모든 주에서 합법적인 임신 중지가 금지되고, 동성 결혼에 위헌 판정이 내려집니다. 미국 정부는 확실한 기독교도만 이민자로 받아들이고, 법무부엔 이민 자격을 판단하는 특별팀이 만들어집니다.
미국의 스릴러 소설가, 더글러스 케네디의 소설 <<원더풀랜드(원 제목은 Flyover)>>에 등장하는 설정입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공화당 소속 '기독교 원리주의자' 후보의 이름은 제럴드 콤프턴입니다. 트럼프와 이름은 다르지만, '트럼프와 비슷한 성향'이라고 작가가 노골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제럴드 콤프턴의 집권을 계기로 미국은 끝내 두 나라로 분열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근본주의' 국가가 수립되어 신정(神政) 정치를 실천합니다.
극우 정치와 결합하는 기독교 근본주의가 그저 소설가가 상상하는 무대 장치가 아닙니다. 이번 대선을 보도하는 미국 언론을 살펴보면 '기독교 국가주의'(Christian nationalism)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기독교의 교리가 미국의 법률과 제도로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치 권력과 종교를 분리해야 한다는 미국 사회의 오래된 신념을 흔들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독교 국가주의'라는 말이 다소 모욕적 표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트럼프 집권기를 거치며 이 단어에 저항감을 가진 사람들이 줄었다는게 미국 언론의 분석입니다. 10월 29일 워싱턴포스트엔 미국인 10명 중 3명이 기독교 국가주의(Christian nationalism)를 추종하거나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는 조사 결과가 실렸습니다.
문제는 이들의 믿음에 일관성이 없다는 겁니다.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미국의 성적 타락을 우려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희롱, 성추행을 비롯해 온갖 추문에 휩싸인 트럼프를 배척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지난해 미국에 출간된 <<나라, 권력, 영광(The Kingdom, the Power, and the Glory)>>이라는 책을 보니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트럼프를 다윗과 솔로몬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로 여긴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뜻을 이루기 위해 결함이 있는 인물을 사용하는 오랜 전통'에 트럼프가 부합한다고 여긴다는 거죠. 심지어 트럼프가 재임 중에 거듭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믿기도 합니다. 보수 성향 연방대법원 판사들을 임명해 앞으로 50년 동안 미국을 변화시킬 토대를 마련했다는 겁니다. 특히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에게 가장 첨예한 쟁점은 낙태입니다. 이들은 2022년 연방대법원의 임신중단권 폐기 결정을 트럼프와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이룩한 성취로 여깁니다.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이번 대선을 선과 악의 대결로 인식하고 있지만, 정작 낙태를 제외한 다른 현안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쟁하거나 숙고하지 않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지적 태만과 교단 내 반지성주의가 불러온 결과로 보입니다. <<나라, 권력, 영광>>의 저자 팀 앨버타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에게 묻습니다. 낙태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면, 산모 사망률을 높이는 미국의 후진적 의료 시스템, 어린이 사망 원인 1위인 미국의 총기 보유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는지. 팀 앨버타는 이들이 국가와 영향력, 출세라는 세속적 우상을 섬기고 있다고 질타합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낙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기독교 국가주의가 사그러들 것 같지는 않습니다. 4년 전에도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가 결과에 불복하면서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했습니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실체를 드러내면서 '샤이(shy) 트럼프'들이 부끄러움마저 잊어버린 계기가 됐습니다. 대선 이후 미국이 두 나라로 쪼개진다는 상상이 소설로 그치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 <<나라, 권력, 영광>>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해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습니다. 재미는 없습니다. 재미 없어도 읽어야 하는 책 목록이 있다면, 이 책을 넣고 싶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