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이 있던 어제, 상하원 의원 선거도 함께 치러졌습니다. 잠시 뒤면 당선자가 가려지겠죠. 어제 워싱턴포스트에 재미있는 칼럼이 실렸습니다.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상하원 의원을 뽑는 건 어떨지, 질문을 던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칼럼을 쓴 사람은 한국에서도 꽤 유명한 베스트셀러 저자 다니엘 핑크였습니다.
다니엘 핑크는 추첨으로 상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lottocracy'가 선거보다 민주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과 돈, 인맥을 가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선거는 본질적으로 '귀족정'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다니엘 핑크는 선거가 기존의 권력 구조를 복제한다고 지적하죠.
선거가 계속해서 민주주의의 동력이 될 수 있을지 의심하는 사람들은 꽤 많이 존재합니다. 벨기에 역사학자 다비트 판 레이브라우크는 <<국민을 위한 선거는 없다>>에서 정당과 미디어의 관계 측면에서 선거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레이브라우크에 따르면 과거 정당은 노동조합, 협동조합(한국에선 협동조합이 낯설지만, 유럽에선 협동조합이 국민 경제에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군요) 을 통해 시민들과 접촉하고, 미디어는 정당과 시민의 매개체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미디어는 여론을 거래하는 장소로 변질됐습니다. 선거는 '유권자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미디어를 끼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벌이는 전투'가 됐습니다. 선거가 곧 민주주의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선거 대신 제비뽑기를 도입하자는 게 레이브라우크의 주장이죠.
선거로 유지되는 대의 정치가 왕정만도 못할 수 있다는, 농담인지 탁견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주장도 있습니다. 왕은 적어도 자기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줘야 하기 때문에 국부를 아끼지만, 선출된 지도자는 자기 임기만 무사히 넘기면 되니까 국가 자원을 탕진하기 쉽습니다. 경제학자, 정치 철학자 한스헤르만 호페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신인가>> 에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선거의 대안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추첨이 모두에게 공평한 참정권을 제공할 것 같지만, 정작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의 역량이나 전문적 식견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레이브라우크는 보좌진의 도움이나 교육을 통해 보완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다니엘 핑크의 생각은 다릅니다. 추첨으로 뽑힌 이들이 관료를 비롯한 전문가의 전문 지식에 과도하게 의존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또 추첨으로 뽑힌 사람들에게 전문 지식을 공급하는 세력이 '공공 지식인'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로비스트가 될 수도 있죠. 이런 과정을 통해 결국 투표로 선출되지 않은 이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할 수도 있습니다.
다니엘 핑크는 2016년 아일랜드에 도입된 '시민 의회'를 대안으로 거론합니다. 아일랜드 시민 의회에서는 무작위로 선출된 99명의 시민들이 사회 주요 의제에 대해 숙의를 거쳐 결론을 내립니다. 의회가 이들의 결정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갈등이 첨예한 사안에 대하여 시민 의회의 권고는 무시할 수 없는 권위를 발휘합니다. 2018년 국민투표로 헌법을 고쳐 낙태죄를 폐지하기 전에 시민 의회는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선거를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부르죠. 하지만, 선거 당일에 이런 칼럼이 등장한 것을 보면 미국에서도 선거 제도에 대한 피로와 회의를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은가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