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는 직업적 정치가의 몇 가지 유형이 등장합니다. 우선 성직자와 인문 교육을 받은 문인, 궁정 귀족입니다. 네번째 유형은 영국에서 발견되는 특징적 계층으로, 젠트리(gentry)로 불리는 '도시 귀족'입니다. 과도한 단순화를 무릅쓰고 우리 말로 옮기자면 '도시 중산층' 정도로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섯 번째 유형은 대학 교육을 받은 법률가층입니다. 베버에 따르면 프랑스 대혁명 이후 근대적 변호사와 민주주의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정당 정치는 결국 이익집단들에 의해 정치가 운영되는 시스템인데, 변호사의 직업적 능력이 발휘되기에 좋다고 베버는 말합니다. 이해 당사자 어느 한 쪽이 유리하도록 소송을 이끌어 가는 것은 변호사의 특장점이기 때문입니다.
성직자가 정치에 관여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한국에서 최근 부활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만...) 문인, 궁정 귀족, 젠트리라는 개념도 지금은 희미해졌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직업적 정치가로서 끈질긴 생명력과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하는 계층은 법률가입니다. 한국을 생각해봐도, 또 미국을 떠올려봐도 법률가 출신 정치인은 숱하게 많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현직 대통령이 법률가입니다. 차기 대통령도 어쩌면 법률가 출신 인사가 될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도 오바마 전 대통령이 변호사였고, 트럼프 대통령과 맞붙었던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은 캘리포니아 검찰총장이었습니다.
제가 범부(凡夫)인 탓에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돈이든 명예든 남 부러울 것 없는 법률가들이 정치라는 오니(汚泥)를 뒤집어쓰는 이유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 나라를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라는 식의, 허방다리 짚는 이야기는 자주 들었지만 공감이 가지 않습니다. 저도 이 나라를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는 걱정은 듭니다만, 투표조차 멀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글의 가장 마지막 단락에 나옵니다.) 그래서 법률가 출신 정치인들이 쓴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보면 정치적 각성의 '모먼트'를 주의깊게 살펴봅니다. 비록 사후적으로 윤색되었다 하더라도 정치인이 어떻게 자신의 철학과 세계관을 벼렸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예컨대 해리스는 자서전 <<우리가 가진 진실>>에서 인생의 결정적 순간으로 1988년의 로스쿨 마지막 여름방학을 꼽습니다. 해리스는 검찰청에서 인턴 생활을 하다 한 검사가 어느 '금요일'에 체포한 마약 사범들을 접하게 됩니다. 체포의 적절성에 대해 판단해야 할 판사들은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고, 마약 사범들은 꼼짝없이 주말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체포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은 범행 현장에서 구경만 하다 잡혀온 여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엄마였습니다. 만약 그 여성이 석방되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엄마없이 휴일을 보내야 합니다. 자녀들은 엄마가 마약 사건에 연루됐다는 것도 알게 될 겁니다. 해리스는 법원 서기에게 이 여성의 사건을 먼저 처리해 달라고 요청했고, 다행히 그 여성은 극적으로 석방됩니다. 고작 인턴에 불과한 예비 법조인이 한 여성의 가정과 존엄성을 지켜냈다고 해리스는 기억합니다. 해리스는 그 일 이후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고 말합니다.
이번 주말엔 '정치인 한동훈'의 따끈따끈한 신간 <<국민이 먼저입니다>>를 읽었습니다. 공소장의 범죄사실을 읽는 느낌이 들어 예전에 검찰청을 출입하던 시절이 잠깐 떠올랐습니다. 그때 중앙지검장이던 지금의 대통령은 "한동훈 검사가 쓴 공소장은 어려워서 나도 이해 못한다"고 했는데 다행히 이번 공소장은 이해하기 쉽게 쓰여졌습니다. 다만, 정치적 각성의 '모먼트'를 찾지는 못했습니다. "정치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정치인 한동훈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정치는 공공선의 추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말로 그걸하고 싶어서 정치합니다."
저는 앞으로 정치인 한동훈을 만날 기회는 없을 듯 합니다. 어느 기자가 대신 물어봐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계엄의 밤 이전, 인생의 결정적 순간은 언제였느냐고요. 참고로 저는, 기자는 투표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던 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 레오나르도 다우니의 소신에 격렬히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이 글엔 아무 정치적 함의도 없습니다. 그저 독자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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