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를 기어이 정주행했습니다. 사소한 한 장면이 유독 눈에 남습니다. 고령의 오애순이 의사에게 고기를 먹어도 되는지 물어봅니다. "고기가 안 좋다고 해가지고..."라며 말을 흐리자 의사는 이렇게 답합니다. "잘 드시면 좋죠." 재차 의사에게 "뜸은 떠도 되는지?"라고 물으니 "인터넷에서 찾은 거 다 물어보시게요?"라는 답이 돌아옵니다.
사실 저도 혈압이 높은 편이고 콜레스테롤 수치도 높아서 매달 병원에 가는데 비슷한 질문을 늘 했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의사 선생님이 친절한데다 꽤 친해진 덕분에 드라마에 등장하던 볼통한 답변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의사에게 물어봐도 되는 적당한 '선'은 어디쯤인지 늘 헷갈립니다.
베스트셀러 <<서재 결혼시키기>>로 유명한 앤 페디먼이 쓴 책 가운데 <<리아의 나라>>라는 논픽션이 있습니다. 미국에 정착한 라오스 난민, '몽족' 부부의 아이 '리아'가 급작스러운 발작 증세를 보입니다. 미국의 의료진은 뇌전증으로 진단합니다. 몽족은 이 현상을 '코 다 페이'라 부릅니다. '코 다 페이'는 "영혼에게 붙들리면 쓰러진다"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의료 체계에서 뇌전증은 치료가 필요한 질병이지만 몽족에게 뇌전증은 영예로운 '샤먼'이 될 수 있는 독특한 능력입니다. '코 다 페이'는 무의식의 세계로 접속한다는 증거고,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치 넹'이라는 지위를 얻습니다. '치 넹'은 "치유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뜻합니다.
뇌전증에 대한 인식 차이, 의사와 환자 사이에 존재하는 문화적 간극은 리아의 병을 악화시킵니다. 몽족 부부는 치료와 약물 중심의 미국식 치료를 의심하거나 두려워합니다. 미국인들은 의사의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고, (미국인의 눈으로 볼 때) '주술'에 의존하려는 몽족 부부를 아동 학대자로 생각합니다. 누구의 책임이라고 이분해서 단정할 수 없지만, 결국 부부의 아이는 식물인간 상태에 빠지는데요, 얼핏 의사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몽족 부부의 무지가 불러온 비극 같습니다. 그러나 의료진의 처방이 적절했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도 적지 않습니다. 게다가 몽족 부부는 몽족 전통 방식으로 식물인간 리아를 20년 넘게 보살폈습니다. 식물인간 상태가 5년도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을 고려하면 몽족 부부의 치료가 효능이 없었다 보기도 어려운거죠.
이 책은 적절한 문화적 소통이 의료 행위에도 필수라는 점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환자와 그 보호자가 참여하지 못하는 의료 행위도 문제로 지적합니다. 특히 저자는 의사가 환자와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분리되는 훈련을 수행하는 점을 미국 의료 교육의 한계로 꼽습니다. 반대로 몽족 환자는 의료 전문가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들으면 "저를 보살펴주고 좋아해줄 사람을 아시나요?"라고 되묻는다고 합니다. 몽족 환자 리아와 그 부부의 눈에 미국 의사는 미더운 존재가 아니었을 겁니다.
이 책은 미국 의과대학에서 필수 교양 도서라고 합니다. 실제로 미국 대학교 구내 서점에서 이 책이 쌓여있는 걸 자주 봤습니다. 어떤 의사가 좋은 의사인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우리나라 의대 교육이 정상화의 갈림길에 섰다고 하는데, <<폭싹 속았수다>> 정주행 뒤 시간이 좀 남는다면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의사 뿐만 아니라 환자도요.